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중앙 칼럼] 리튼하우스 재판의 ‘진실공방’

 무죄 평결로 막을 내린 카일 리튼하우스 사건은 주류 언론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냈다.   변호사로도 활동했던 글렌 그린월드는 현재 탐사보도 저널리스트다. 퓰리처상 최고 영예인 공공서비스상을 가디언지에 안겨준 인물이다. 그가 지난 19일 리튼하우스가 무죄 평결을 받은 직후 언론계에 일침을 가했다.   그린월드 기자는 “전세계 언론 매체가 죽은 사람들이 백인임에도 ‘흑인’이라고 반복 보도했다. 이는 미국 언론이 리튼하우스를 ‘백인 우월주의자’로 몰아가며 오도한 결과”라며 “미국 언론에 속은 매체들은 희생자를 당연히 흑인으로 여긴 것”이라고 비판했다.   언론이 언론에 속았다. 오보는 집단적으로 생산됐다. 한국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미 법원, 자동소총으로 흑인 2명 살해한 백인 청년 무죄’ ‘흑인 2명 총격살해한 백인 10대 무죄 방면’ ‘무죄평결 받은 흑인 시위대 발포자 리튼하우스’ ‘흑인 시위대에 총 겨눈 백인 청소년 무죄’ ‘흑인 시위대에 발포, 2명 사망케 한 백인 청소년’ ‘흑인에 총 쏜 10대, 트럼프 지지자’.   실제 일부 한국의 언론사들이 이번 사건을 두고 보도한 기사 제목들이다. 심지어 평결 후인데도 ‘흑인’과 ‘백인’의 구도에서 보도했다.     이건 오역이 아니다. 사건의 기본 내용조차 모르고 그대로 번역만 한 결과다. 더 심각한 건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리튼하우스 사건을 그럴싸하게 분석까지 한 기사도 있었다.   단순 번역은 죄가 없는가. 그렇다면 원죄를 주류언론에 묻는다. 뉴욕포스트의 칼럼니스트 미란다 디바인은 17일 ‘카일 리튼하우스에 대한 10가지 악랄한 거짓말이 드러났다’는 글을 썼다. 사건을 오도한 주류 언론의 보도 내용을 도마에 올렸다. 전자는 주류 언론의 보도 내용이고, 후자는 공판 과정 등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디바인은 ▶리튼하우스가 두 명의 흑인 BLM 시위자를 죽임/ 희생자는 모두 백인 ▶(총을 쏘려고) 일부러 주경계선을 넘어옴/ 리튼하우스는 친지, 친한 친구가 모두 커노샤카운티에 살고 있고, 직장도 그곳에 있었음 ▶총(AR-15)을 주경계선을 넘어 반입함/ 총은 커노샤카운티에 사는 친한 친구의 아버지 집에 보관해 왔음 ▶총기를 불법소지했음/ 위스콘신 주법은 17세의 총기 소지를 허용 ▶리튼하우스의 어머니가 아들을 폭동 현장까지 운전해서 데려다줌/ 당시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일한 뒤 집에서 자고 있었음 ▶“총을 쏘려고 시위대를 찾아다니는 총격범이다”/ 당시 상황을 전하던 MSNBC 뉴스 진행자 조 스카버러가 “주 경계선을 넘어온 17세 소년이 뛰어다니며 시위대를 총으로 쏴서 죽이고 있다”며 왜곡한 말 ▶조 바이든은 리튼하우스를 ‘백인 우월주의자’로 명칭함/ 연방수사국(FBI)이 전화기록까지 모두 조사했지만 백인우월주의자라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음 ▶리튼하우스가 ‘프라우드 보이즈’와 함께 사진을 찍으며 백인 우월주의 손 표시를 했음/ 어머니와 함께 바에 갔다가 사람들과 사진을 찍던 중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한 것을 두고 백인우월주의자로 매도됨 ▶지문을 감추기 위해 수술용 장갑을 끼고 있었음/ 리튼하우스는 당시 부상당한 시위대를 응급처치하기 위해 장갑을 끼고 있었음 ▶담당판사 브루스 슈뢰더는 인종차별적 트럼프 지지자로 피고 측에 편향된 인물/ 슈뢰더 판사는 민주당 주지사가 임명했고 위스콘신주 민주당 상원의원 출마 등의 내용을 지적했다.   비단 이번 사건 뿐인가. 주류 언론이 사안을 오도한 건 한 두 사례가 아니다. 주류 언론에만 의존해 정보를 수용하고 사안을 인식하다가 자칫하면 인지왜곡에 빠질 수 있다. 장열 / 사회부 부장중앙 칼럼 진실공방 재판 흑인 시위대 시위대 발포자 주류 언론

2021-11-29

"25년 전 상처 기억하며 미래로"

한인.흑인.라틴 커뮤니티 시민과 정치인이 4.29폭동 25주년의 교훈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들은 지난 29일 LA한인타운 일대에서 다양한 행사를 열어 폭동이 남긴 상처를 희망으로 치유하자고 다독였다. 이날 오전 10시 LA한인타운 옥스포드애비뉴와 만나는 윌셔불러바드 코너에서는 한인 청소년과 라틴계 주민이 '사랑의 인간띠 만들기'에 나섰다. 라틴아메리칸장애인연합(UDLA)과 코리안아메리칸유스프로그램(KAYP) 회원 약 100명은 '4.29를 잊지 말자, LA에 평화를, 화합과 협력, 희망'을 적은 종이팻말을 들고 손을 맞잡았다. 한인 청소년들은 과거 폭동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놀라는 눈치였다. 김찬기(16.발렌시아고교)군은 "1992년을 검색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때 폭력과 방화로 한인타운이 불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면서 "다시는 폭동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민 1세대인 부모세대가 겪은 아픔에 공감하며 응원도 아끼지 않았다. 김보경(15.밴나이스고교)양과 이한나(16.존마샬고교)양은 "부모 세대가 더는 폭동의 아픔을 숨기거나 슬퍼만 하지 않기를 바란다"며 "우리 모두 한인사회를 사랑한다. (부모 세대가) 아픔을 이겨내고 번창하는 한인타운을 만들어줘 고맙다"고 말했다. 노먼디애비뉴와 올림픽불러바드에서는 '평화대행진'이 열렸다. 다인종 참가자 500여 명은 1992년 5월 2일 폭동 피해를 당한 한인 10만 명이 평화와 정의를 외쳤던 모습을 재연했다. 평화대행진 참가자들은 LA경찰국 호위를 받으며 올림픽가 노먼디와 버몬트 구간을 행진했다. 이날 정오 LA한인타운 남쪽 FAME 흑인교회에서 열린 LA한인회(회장 로라 전) 주최 '4.29 통합-주목 받지 못한 영웅을 기리며' 공식기념행사에는 한.흑 커뮤니티 인사와 LA시 정치인 약 150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폭동이 남긴 상처를 어루만지고 미래로 나가자고 다짐했다. FAME교회 에드가 보이드 수석목사는 "1992년 우리는 63명의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 서로가 하나된 마음으로 LA시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힘을 합치자"고 말했다. 에릭 가세티 LA시장은 "우리가 지난 25년 동안 힘든 시간을 이겨내 왔지만 '상처'는 잊을 수 없다. 그때 상처를 보듬자. 한인.흑인.라틴계 등 모든 커뮤니티 구성원이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공정한 기회를 나누는 LA시를 만들자"고 강조했다. 한편 에릭 가세티 LA시장과 허브 웨슨 시의장은 한인사회가 4.29를 폭동(Riot)으로 표현한 것과 달리 사회불안(Unrest)으로 불러 대조를 보였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

2017-04-30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1992년 4.29폭동은 미주 한인 이민사에 가장 큰 아픔으로 기록됐다. 한인사회는 외면받았지만 그 상처는 '나이테'가 돼 켜켜이 아름드리 나무가 됐다.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섰다. 관계특집 2.3면> 25년이 흐른 지금 주류 사회는 한인사회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고 있다. CNN은 28일 특집기사에서 '4.29폭동이 한인사회를 각성하게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특히 CNN은 한인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전했다. 25년 전 LAPD 공권력 공백과 주류 언론의 왜곡보도를 가감 없이 전하며 당시 주류사회가 한인사회를 시야에 들어오지 않은 존재로 취급했다는 사실도 고백했다. ABC방송은 '4.29폭동은 한인 이민사에 기록된 '911(뉴욕 테러)'이라며 한인사회 아픔을 전했다. 이 방송은 당시 주류 언론이 폭동 현장의 공권력 공백 문제를 다루기보다 총을 든 한인 자영업자의 폭력성만 부각했다고 인정했다. 한 한인의 "우리에겐 경찰도 소방관도 없었다"는 한 담긴 눈물은 방송의 하이라이트였다. 한인과 한인 1.5~2세가 느낀 배신의 분노는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거듭나게 했다. 한인사회는 주류사회가 더는 외면할 수 없도록 정치력 결집에 나섰다. 잿더미로 변한 LA한인타운을 25년 만에 LA의 가장 번성한 상업지구로 만들었다. 주류사회가 짐짓 놀라는 한인사회 재기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10대 때 4.29 폭동을 겪은 데이비드 류 LA시의원(4지구)과 로버트 안 연방 하원의원 34지구 후보는 '정치력 신장과 코리안 아메리칸 정체성 확립'을 꼽았다. 두 사람은 "그 시절 분노했고 우리의 지도자는 없었다. 너무 억울했다. 우리가 받은 차별을 잊지 말자는 교훈은 정치력 신장"이라고 강조했다. 고 이재성군 어머니 이정희씨는 한인 이민사회의 굴하지 않는 의지와 희망을 당부했다. 25년 만에 주류 언론(NBC방송) 인터뷰에 나선 이씨는 "차세대인 2~3세 한인은 단합된 커뮤니티를 만들면 좋겠다. 그게 내가 여기 나온 이유"라고 말했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

2017-04-28

"한·흑 모두에게 큰 상처 치유 위해 손 맞잡아야"

가해자·피해자 등 인터뷰 고 이재성씨 유족도 만나 ABC 통해 미 전역에 방영 "소통의 부재로 갈등 쌓여 그 갈등이 한꺼번에 폭발 세월 흘러도 현재 진행형" "소통의 부재로 쌓였던 한인.흑인 간의 갈등과 오해가 폭동의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공존'할 수 없었던 거죠." 1992년 LA 4.29 폭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렛잇폴: 로스앤젤레스 1982~1992(Let It Fall : Los Angeles 1982~1992)'를 제작한 흑인 감독 존 리들리(52.사진)는 27일 뉴욕대에서 열린 시사회 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두 커뮤니티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폭동 이후 긴장 관계는 완화됐지만 지금도 불씨는 남아 있다"며 "이제는 한인과 흑인 커뮤니티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손을 맞잡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4.29 폭동 25주년을 맞아 제작된 렛잇폴은 2014년 '노예 12년'으로 제86회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리들리 감독의 첫 다큐멘터리 영화다. 2시간24분 분량으로, 폭동 10년 전인 1982년부터 92년까지의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배경을 별도의 내레이션 없이 당시 뉴스 클립과 목격자 및 폭동 가담자, 피해자 등의 인터뷰로 풀어냈다. 폭동의 유일한 한인 사망자인 고 이재성씨의 유가족 인터뷰도 담겼다. 영화는 "4.29 폭동은 로드니 킹 사건과 관련 경관의 무죄 평결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맞지만 그 전부터 고조돼 온 다인종 갈등이 원인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는 폭동 발생 13개월 전인 1991년 3월 19일, LA에서 식품점을 운영하던 한인 업주가 물건을 훔쳐가던 흑인 소녀와 몸싸움을 벌이다 총을 쏴 숨지게 한 이른바 '두순자 사건'도 등장한다. 하지만 리들리 감독은 "이 같은 단편적인 사건들이 폭동을 불러온 것은 아니다. 여러 인종 간의 오래된 갈등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리들리 감독은 "로드니 킹 사건 당시는 LA시경이 논란이 됐던 범인 제압 기술인 '초크홀드(chokehold)'를 금지하고 곤봉으로 범인을 때리는 시대였다. 또한 LA가 84년 올림픽을 개최해 국제적 대도시로 떠오르자 마약과 갱 집중 단속을 통해 범죄 척결을 시도하면서 흑인 대상 과잉 진압에 대한 논란이 대두되고 있던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도 시간과 장소만 바뀌었을 뿐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시점에서 폭동과 관계 있는 이들의 증언을 통해 이 시대에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고 영화 제작 취지를 설명했다. 이 다큐는 28일 ABC 방송을 통해 미 전역에 방영됐다. 한편 4.29 폭동은 주방위군이 출동한 직후인 5월 3일까지 닷새 동안 2300여 업소를 방화하고 약탈했으며, 이 중 3분의 1에 달하는 700여 곳이 한인 업소였다. 한인 1명을 포함해 53명이 숨지고 4000여 명이 다쳤으며, 물질적 피해는 10억 달러에 달했다. ◆존 리들리 감독=1965년 위스콘신주 밀워키 출생으로 뉴욕대(NYU)를 졸업했다. 지난 2014년 영화 '노예 12년'으로 제86회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했다. 할리우드 영화 '벤허' 2016년 리메이크작과 '레드 테일즈(2012년)' '언더커버 브라더(2002년)' 등의 각본을 맡았다. 현재 ABC방송의 인기 드라마 '아메리칸 크라임' 시즌3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서승재 기자 seo.seungjae@koreadaily.com

2017-04-28

LAPD, 4·29 당시 전략 부재…현재는 유대 강화·초전박살

4·29 LA폭동 피해 규모가 컸던 이유 가운데 하나로 경찰의 초기 대응 미흡과 전략 부재가 꼽힌다. 폭동 발생 초기에 경찰이 제대로 대응했다면 한인타운과 인근 지역이 사흘 동안이나 폭도들로 인한 무법천지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로드니 킹 사건에 연루된 4명의 백인 경관에 대해 무죄평결이 내려질 경우 발생할 수도 있는 폭력사태 대비책을 LAPD에서 마련해 놓지 않았다는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책으로 꼽힌다. LA타임스는 27일, 4·29 폭동 당시와 현재의 경찰 대응 방식을 비교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폭동이 발생한 당일 오후 3시 15분, 4명의 백인 경관에 대해 무죄평결이 내려진다. LAPD는 당시 소수계 커뮤니티 지도자나 정치인, 시민단체 관계자와의 대화 통로가 없었다. 25년이 지난 현재는 이 같은 실수를 교훈 삼아 각 커뮤니티와의 관계 강화에 지속적으로 나서고 있다. 전직 갱 멤버를 통한 지역 정보 수집도 하고 있다. 약 2시간이 지난 오후 5시25분, 플로렌스와 노먼디 교차로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지나가는 차량에 맥주 캔을 던지는 등 소란이 벌어지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된다. 경찰 순찰대가 출동하지만 시위대 규모에 압도되어 바로 퇴각한다. 이 시점부터 폭동은 과격해진다. TV에서는 생방송으로 이 장면을 보도한다. 시민들은 "경찰은 어디 있나?"라고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현재의 대응방식은 초전박살이다. 폭동 발생 초기에 경찰력을 최대한 투입해 바로 진압하겠다는 전략이라고 LAPD는 밝히고 있다. 김병일 기자 kim.byongil@koreadaily.com

2017-04-27

"엄마, 우린 왜?" 2세들 고통의 기억 두권 책으로 발간

한인 2세들이 최근 4·29 폭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했다. 어렸지만 4·29 LA폭동을 함께 넘어온 이들이다. 책을 펴낸 캐롤 박과 그레이시 김씨는 '1992년 4월은 우리 2세들에게도 그리 따뜻하지만은 않았던 봄날로 기억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애써 아픈 기억을 들추어 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책 '캐시어의 기억(Memoir of a cashier)'을 펴낸 캐롤 박씨에게 4·29 폭동은 이해하기 힘든 아픔 그리고 분노로 남아 있다. 박씨는 "화가 났다. 한동안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있어야 하는지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형적인 이민 가정에서 자랐다. 박씨의 부모는 흑인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는 캄튼에서 24시간 오픈하는 주유소를 운영했다. "10살 때부터 부모님이 운영하는 주유소에서 일을 했어요. 밤새 엄마와 함께 방탄 유리가 쳐진 좁은 주유소에 앉아 있어야 했죠." 그렇게 박씨는 청소년기의 많은 시간을 방탄유리 안에서 보냈다. 흑인으로부터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나 욕설을 듣는 것은 부지기수였고 늦은 시간 가게를 보다가 바로 눈 앞에서 총격으로 사람이 죽어 가는 것도 목격했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들을 겪어야 했다. 4·29 폭동은 박씨가 12세였을 때 터졌다. "사건이 터졌을 때도 힘들었지만 그 이후에도 수년이 지나도록 마음 속의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았어요. 매년 주류 언론들이 4·29 폭동에 대해 보도했는데 한인사회를 왜곡 보도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한 번도 한인이민자의 이야기가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었죠. 정체성의 혼란기를 겪으면서는 그 상황이 더 화가 났죠. " 박씨의 어린 눈에도 한인사회는 무기력해 보였다. "한인들은 힘이 너무 없었어요. 목소리를 내지 못했죠. 지금이야 그때보다는 조금 나아졌기는 하지만요. 그래서 책을 쓰기로 결심을 했죠.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높이는 데 동참하고 싶어서요." 그는 6년 반이라는 시간을 들여 책을 마무리했다. "한인 2세들이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해요. LA폭동과 같은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야죠. 그래야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니까요." 캐롤 박씨는 UC리버사이드에서 공부했으며 코리안아메리칸 전문리서처이자 저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그레이시 김씨는 소설 '부디 엄마를 사랑해 주세요' (Please Love Umma)에 4·29 폭동을 녹여냈다. "소설의 배경이 1991년부터 1992년까지예요. 4·29 폭동에 대한 내용이 빠질 수가 없죠." 그 역시 당시에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너무 어렸어요. 하지만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은 알았죠. 학교에도 밖에도 나갈 수 없었으니까요. 어른들 역시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김씨는 4·29 폭동을 겪어야 했던 힘겨운 이민자의 삶을 주인공인 어린 소녀의 눈을 통해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소설 속에는 4·29 폭동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죠. 동네 오빠들이 지붕 위에서 총을 들고 방어하는 모습도 있고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던 엄마는 4·29 폭동 후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 되어 심장마비로 돌아가세요. 그만큼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컸던 거죠." 김씨는 이번 책을 2세 한인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읽어봐 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특별히 한인 2세들을 위한 책을 쓰고 싶었어요. 2세들이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책이요. 어디에도 한인 2세가 주인공인 책은 없으니까요. 2세들이 제대로 정체성을 확립해야 이민자를 위한 목소리도 낼 수 있을 거라 봅니다." 그레이스 김씨는 UCLA를 졸업하고 회계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오수연 기자 oh.sooyeon@koreadaily.com

2017-04-27

한줌의 기억을 담을 한평의 박물관도 없다

4·29폭동 25년이 흐른 지금 한인사회가 받은 상처는 아물었을까. 1992년 한인사회는 폭동을 계기로 두 얼굴을 마주했다. 한국과 미 전역에서 1240만 달러라는 구호성금이 답지했다. 가정주부인 조영진씨는 폭동에 맥없이 불타는 한인타운을 보고 '평화대행진'을 제안했다. 5월 2일 10만 명에 이르는 한인이 LA한인타운에 모여 정의와 평화를 외쳤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공권력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억울함과 서러움을 달랬다. 폭동이 잠잠해진 직후 한인사회 구성원들은 절대 이날의 아픔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여러 단체가 만들어졌다. 4·29박물관 건립 등 역사를 기록하자는 외침도 힘을 얻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25년 전 폭동의 아픔을 치유하겠다고 나섰던 인사들은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4·29폭동 구호단체들과 관여했던 주요 인물을 찾아봤다.출처:한미교육연구원·한인역사박물관> 김형재 기자 4·29폭동범동포한인비상대책위원회 1992년 5월 1일 LA총영사관 박종상 총영사와 한인단체장들은 범동포한인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한국 대한적십자사(총재 강영환)의 성금 453만 달러를 피해자 500~700명을 선정해 피해자 1세대당 약 2500달러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초대 위원장: 강득희 상공회의소회장 (이하 모두 당시 직책) ▶공동의장단: 이종원(LA한인회)·하기환(LA상공회의소 부회장)·김치현(한미식품상협회 회장)·전수웅(한인타운교민회) ▶고문단: 정의식(한국노인회장)·이민휘(재미대한체육회장)·신한구(교회협의회장)·홍영환(남가주한인목사회장)·김도안(남가주불교사원연합회장)·이상섭(가톨릭사제단) 성금분과위원회(한미구호기금 전신) 4·29폭동범동포한인비상대책위원회 산하 성금분과위원회는 한국 대한적십자사 성금 453만 달러 배분을 총괄하며 4·29폭동한인피해자협의회와 대립했다. 이 단체는 폭동 직후 한미구호기금으로 명칭을 바꾸고 2005년까지 활동한다. 성금 배분 과정에서 약 135만 달러는 '4·29박물관' 건립 기금으로 별도 배정했다. 이후 LA한인타운 6가와 카탈리나 코너 건물(현 MBC아메리카 사옥)을 매입한다. 하지만 1999년 해당 건물을 헐값에 매각한다. 이사장 공금유용, 은행 주식투자 탕진 등으로 지탄을 받았다. ▶성금관리위원장: 1대 하기환, 2대 전수웅, 3대 최상봉, 4대 곽철, 5대 이민휘, 6대 전주찬 한인비상구호대책본부 1992년 5월 1일 한국일보는 미주본사와 한국 한국일보 성금모금 활동에 나서며 한인비상구호대책본부를 발족했다. 미주 350만 달러, 한국에서 440만 달러를 모금해 피해자 약 2000명에게 1인당 500~2000달러를 전달했다. 이후 한인비상구호대책본부는 4·29폭동한인피해자협의회의 계속된 요구에 따라 약 146만 달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원장: 유의영 박사(캘스테이트LA 교수) ▶위원: 장재민(한국일보 회장)·유근관 교수·김봉환(한인청소년회관장)·안용식·안덕원 목사·강성용 변호사·신영한 CPA·신종욱·민병용·윤온숙·김영빈·김선영 등 4·29폭동한인피해자협의회 1992년 5월 1일 폭동피해자모임을 자청한 이정·임춘훈·홍사일·이종원씨 등은 한인 피해자 2150여 명을 대표한다며 별도 구호단체를 구성했다. 이 단체는 한국 대한적십자사와 한국일보 구호성금 총 1243만달러를 직접 배분하겠다며 구호단체들과 대립했고 법원 소송도 제기했다. 이후 이 단체는 구호성금 배분 내용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아 투명성 부실 비판에 직면했다. ▶초대위원장: 이정 ▶부회장: 손원호·권익남 ▶위원: 임춘훈·홍사일·이종원 등 4·29성금 단일화추진위원회 1993년 3월 17일 이민휘씨는 한미구호기금재단과 4·29폭동한인피해자협의회가 성금 배분을 놓고 대립하자 위원회를 결성했다. 구성원은 4월 13일 한미구호기금재단 이사로 영입된다. ▶회장: 이민휘 ▶이사: 안응균·스칼렛 엄·이영송·유성겸·김영태·김지수 등 4·29폭동이재성추모장학회 1993년 10월 LA총영사관은 한국 정부에서 지원한 영사활동비 약 123만 달러로 '4·29폭동이재성추모장학회'를 설립한다. 장학회 명칭은 고 이재성군 부모의 부탁으로 4·29장학재단으로 변경된 뒤, 한미장학재단, 한인동포장학재단, 한인장학재단 순으로 바뀐다. 한인장학재단은 123만 달러 장학기금을 유지한 채 수익금으로 지금까지 매년 10~30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초대 이사장: 박희민 ☞구호성금 현재 가치 1992년 4·29폭동 한인 구호성금은 1240만 달러로 집계됐다. 25년이 흐른 현재 가치는 얼마나 될까. 인플레이션을 반영해 달러가치를 환산하는 달러타임스(www.dollartimes.com)에 따르면 1992년 1240만 달러는 2017년 2170만 달러의 가치를 지닌다. 1994년 한미구호기금이 성금을 남겨 4·29박물관 용도로 매입한 LA한인타운 6가와 카탈리나 현 MBC아메리카 건물은 당시 135만 달러였다. -------------------------------- 4·29 LA폭동 원인은… 위키백과 한·미판 차이 인터넷 백과사전의 하나인 위키백과 한글판이 4·29 LA폭동 발생 배경설명을 왜곡한 것으로 나타났다. 위키백과는 첫 문단에서부터 '1992년 로스앤젤레스 사태는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 소녀에 대한 인종차별에 격분한 흑인들에 의해 발생한 유혈 사태'라고 잘못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위키백과 영어판은 배경 설명에서 폭동이 로드니 킹 사건 및 관련 경관의 무죄 평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흑인 소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김병일 기자 김형재· 김병일 기자

2017-04-27

또 당할 수는 없다…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주류 사회가 바라보는 1992년 4월 29일 폭동은 '로드니 킹과 흑인사회의 분노'로 요약된다. 언론은 흑인사회의 분노를 다루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한인 자영업소 2300개의 약탈과 방화 피해는 '배경 화면'으로 활용됐다. A&E 케이블 방송의 'LA 버닝'에 출연한 폭동 당시 총포상 주인 데이비드 주씨는 "총을 들면서까지 한인타운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지만, 편집됐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피해 당사자인 우리를 분노의 대상으로만 묘사한 것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말했다. 25년이 흐른 최근 한인사회는 4·29 폭동의 원인 제공자인양 주눅 든 모습에서 벗어나자는 목소리가 높다. 명예회복을 요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데이비드 류 LA시의원(4지구)과 연방하원 34지구에 출마한 로버트 안 후보는 10대 때 겪은 폭동의 진실을 잊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김병수(65)씨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 원인을 유대인에게 돌리는 이는 아무도 없다. 피해자인 우리는 25년 동안 흑인사회에 저자세로 다가갔다. 이제는 우리가 당한 피해와 기록을 진중하게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대인은 피해자로서 당한 모든 것을 영화, 책, 신문, 인터뷰, 다큐멘터리 등으로 전세계에 알렸다. 우리(한인)는 지난 4반세기 동안 '우리에게도 문제는 있었다'는 식으로 대한 측면이 있다. 흑인사회와 연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웃 사회와 협력 차원이지, 원인 제공자로서의 미안함이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4·29폭동 도화선이 미국사회의 구조적인 빈부격차와 흑백갈등이란 사실은 이견이 없다. 흑백갈등의 분풀이 장소가 LA한인타운이었다는 지적도 부인할 수 없다. 차세대 주역인 1.5~2세들은 당시의 아픔을 몸으로 기억한다. 성인이 된 이들은 서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미국 공권력은 우리를 왜 버렸는가. 한인타운이 불타는데 소방차 한 대 없었다. 미국의 정의란 무엇인가. 한인과 아시아계는 이런 소외를 언제까지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제프리 최(33)씨는 "또 당할 수는 없다"고 잘라말했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

2017-04-27

"4·29 때와 같은 실수 되풀이 하지 말아야죠"

"지금은 그래도 집사람하고 포도주 한 잔 기울일 정도는 돼요. 25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름대로 극복도 했고 그만큼 담담해 졌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LA 자바시장에서 대형 의류도매기업, 액티브 USA를 경영하는 돈 이 회장의 시선은 어느 새 25년 전 아픔을 떠올리며 회상에 젖었다. 이민와서 5년 동안 낮밤 없이 일을 하며 힘겹게 장만한 의류공장이 폭도들에 의해 전소가 됐으니, 아픈 기억이 왜 크지 않았을까. 더구나, 4·29 폭동 당시 한인 의류업체가 입은 피해로는 가장 규모가 컸고, 유일하다시피 했으니 실망감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역사가 기록하는 당시 한인 피해의 시작은 1992년 4월 29일 입니다. 하지만 이미 하루 전부터 전조가 있었어요. 한인 라디오에서도 분위기가 심상찮다며 사업체에서 일찍 귀가할 것을 수시로 당부하고 있었죠. '혹시나' 싶어 서둘러 직원들을 퇴근시키고 오후 2시께 일찌감치 공장을 떠났지요."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애지중지 키워 온 사업체가 화염에 휩싸인 것을 TV를 통해 보게 될 줄을 이 회장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모든 게 잿더미로 변했어요. 100만 달러짜리 공장도, 건물 안에 있던 수 백만 달러어치의 원단과 옷, 기계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TV를 보면서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었죠." 다운타운 메인과 31가에 있던 이 회장의 공장은 폭동이 본격화하기도 전에 이미 큰 피해를 봤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이 회장은 이후 6개월 동안은 매일 같이 술로 지냈다고 했다. "매일 고통스러워 하는 저를 보고 아내가 다시 할 수 있다고 격려하고 주변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주지 않았으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싶네요." 이 회장이 재기를 하는 데는 고마운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만큼 자바시장에서 쌓은 신뢰와 성실한 세금보고, 만일에 대비한 보험가입이 큰 힘이 됐다. "애들 돌 사진이나 가족사진첩까지 모두 불에 타버린 다음이라 거래처 외상값이 어떻게 되는지도 증명할 길이 없었어요. 그런데, 거래를 하던 업체에서 먼저, 외상값이라고 주고, 어떤 사람은 격려 편지와 함께 500달러, 1000달러가 든 봉투를 건네주기도 했어요. 연방재난관리청(FEMA)을 통해서는 30년 간 4%대 이자로 50만 달러를 지원받을 수도 있었어요. 당시만 해도 세금보고를 제대로 하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피해를 보고도 융자 혜택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았지요." 이 회장은 폭동의 어려움을 딛고 지금은 다운타운 피코길에 6만 스퀘어피트 규모의 2층 단독 쇼룸(액티브 피코쇼룸)를 가진 업체로 성장시켰다. 액티브 피코 쇼룸을 올해 LA비즈니스저널로부터 가장 주목받는 건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폭동을 겪고 재기에 몸부림치던 시간을 되새기던 이 회장의 이야기는 지금의 자바시장으로 돌아왔다. 사반세기의 간극이 있지만, 요즘 자바시장 한인업체들이 겪는 어려움이 당시의 고통과 오버랩된 탓인 듯 했다. "다운타운 자바시장은 지금 너나없이 모두 힘들어요. 3년 전 수사당국이 대대적인 돈세탁 수사를 한 후로 중남미 고객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어요. 트럼프 정부의 반이민 정책과 노동법 단속 강화로 봉제공장들은 LA를 떠나고 있습니다. 자바 한인업체 물건을 사주던 베베, 웻실, BCBG 등 우호세력들은 자라나 H&M, 유니클로 등에 밀려 궤멸한 상태예요. LA시 정부가 다운타운 변화를 위한 장기 프로젝트를 시행하면서 한 때 의류의 메카라는 자바시장은 기로에 서 있어요." 이 회장은 자바시장의 어려움이 패션경기의 부진 탓이 크지만 한인 업주들의 대비도 부족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패션유통의 혁명적 변화에 대처가 부족했고 한인 정치력 신장에 대한 이해 등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말이었다. "자바시장은 지난 30년 넘게 승승장구했어요. 물건만 만들면 얼마든지 판로는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온라인 상거래를 지배하는 아마존이 패션브랜드까지 만들어 유통을 하는 마당이니, 대응하기도 힘든 상황이지요. 다운타운의 개발정책으로 자바의 소매업체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밀려나고 있기도 하고요. 4·29 때 한인 커뮤니티는 정치력 부족으로 피해를 막지도 못했고, 피해 보상을 위한 하소연조차 제대로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 자바는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고 있어요." 이 회장은 한인사회가 4·29의 상처를 딛고 일어섰던 것처럼, 한인 자바시장도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며 자신의 생각을 꺼내 놓았다. 큰 변화의 흐름 속에 30년 전과 같은 자바시장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의류의 메카라는 자존심을 되찾는 노력을 한다면 후세들에게는 발전된 자바시장을 넘겨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해답을 2세 경영인, 젊은 정치인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류사업에 필요한 영역을 기획, 생산, 관리, 마케팅, 세일즈로 볼 수 있는데, 1세대들이 강점이 있는 것과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는 2세들의 독창적 기획, SNS를 이용한 마케팅과 판매 기법이 조화를 이룬다면 자바시장도 '패션의 실리콘밸리'로 다시 태어날 기회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바에 젊은이들이 꼬이고 창업열기를 확산시킨다면, 고급스러운 패션시장으로 자리매김도 가능하다는 제안이다. "1세대들의 은퇴와 2세대들의 새로운 도전으로 다른 자바가 되는 것이지요. 꼭 2세들이 의류업체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미셸 박 스틸이나, 데이비드 류, 또 오는 6월 6일 연방하원에 도전하는 로버트 안처럼 정치 분야에서 뛰어도 좋아요. 그들이 한인경제의 젖줄이라는 자바와 한인기업,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폭 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면, 자바시장도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액티브 USA 돈 이 회장 약력 ▶영남대학교 명예 경영학 박사 ▶대륜고등학교 졸업 ▶영남대학교 건축공학과 졸업 ▶현 샌피드로패션마트협회 회장 ▶현 태평양은행 이사 ▶현 새한뱅콥 OB 초대 회장 ▶현 세계한상대회 리딩 CEO ▶현 경상북도 해외 명예 자문관 ▶현 회재 이언적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 ▶전 영남대학교 미주 총연합회 동창회 초대 회장 김문호 기자 kim.moonho@koreadaily.com

2017-04-27

"흑백 갈등 속에서 한인은 희생양이었다"

조만철 박사 25년간 환자 기록 보관해 "피해배상소송 필요하다면 적극 돕겠다" 1992년, 4·29 폭동 당시 정신과 상담 또는 전문의 치료를 받은 한인이 2000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조만철 박사는 당시 1차 상담을 받은 한인 수는 2000여 명이었으며 이중 심각한 증세로 정신과 전문의 치료를 받은 한인만도 537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조 박사는 당시 LA카운티 보건국 아태상담센터의 디렉터로 일하고 있었으며 폭동 직후에는 연방재해대책본부(FEMA)와 연계해 폭동 피해자의 정신치료를 주도했다. 조 박사가 25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한인 피해자 중 상당수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보였고 이 중 64.8%(348명)가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증세가 심각했다. PTSD는 사고의 충격으로 정신적 고통이 이어지는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수면장애, 공황장애, 환각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한인 피해자들에게서 나타난 증상 중 주목할만한 것은 '화병'이라고 조 박사는 강조했다. 조 박사는 상담을 거치면서 피해 한인의 상당수가 '화병'에 걸렸다는 것을 인지하고 자가진단서에 화병에 대한 질문을 추가했다.(화병은 울화병이라고도 하는데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한스러운 일을 겪으면서 쌓인 화를 삭이지 못해 생기는 병이다) 조 박사는 "이 질문을 받은 193명 중 70%가 화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며 "이는 폭동으로 인한 억울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25년 전 피해자들이 작성한 질문지를 살펴본 결과 정부와 언론들에 대한 불신이 컸던 것을 알 수 있었다. 40대의 한 남성 피해자는 "미국에 회의를 느낀다. 마치 인종 전시장 속에 한인을 마치 동네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인종차별 없는 고국이 그립다", 또다른 피해자는 "정부로부터 피해 보상을 정당하게 받고 싶다"고 적어 놨다. 이외에도 "총 대 총으로 싸워 보고 싶다"며 분노를 표출하는 피해자가 있는가 하면 "SBA융자액이 너무 적어서 비즈니스를 다시 열 수도 다른 업체를 인수할 수도 없다"며 절망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조 박사는 "LA한인타운만 정부가 보호하지 않고 방치했으며 폭동의 원인을 한흑갈등으로 몰아가는 주류사회에 대한 반감과 억울함이 화병으로 드러난 것"이라며 "피해자에게 4·29 폭동은 아메리칸 드림에서 아메리칸 악몽으로 전환된 끔찍한 사건으로 남게 됐다"고 전했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한인들이 심각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는데도 한인 피해자 중 누구도 정신적 피해 보상이나 사과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 박사는 "혹시나 피해 한인들이 보상을 받는데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당시 정신과 전문 상담을 받았던 한인 중 500여 명의 진료 기록을 지난 25년간 보관하고 있었다"며 "지금이라도 정부로부터 정당한 피해 보상과 사과를 받는데 필요하다면 이 자료를 제공하고 증언하겠다"고 밝혔다. 변호사에 따르면 25년이 지났지만 소송제기는 가능하다. LA폭동 당시 피해 한인편에서 소송을 제기했던 민병수 변호사는 "25년이 지났지만 소송제기는 가능하다. 하지만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인권소송은 싸우기 위함이지 승소를 기대하고 시작하면 안 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장기전이 될 수 있고 실질적인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싸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세계 2차대전 당시 강제로 수용소에 끌려갔던 미국 거주 일본인들은 힘들었지만 오랜 소송으로 50여 년 만에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며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 인권을 위해 또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싸워야 한다"고 전했다. 오수연 기자 oh.sooyeon@koreadaily.com

2017-04-26

"폭동 또 일어날 수 있다"…LA주민 10명 중 6명 우려

1992년 발생한 4·29 폭동 같은 사건이 가까운 미래에 또 발생할 수 있을까? LA주민들은 '예스'라고 답했다. 폭동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커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청년층(18~29세)의 경우 5년 안에 폭동 같은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거의 70%(69%)가 '예스'라고 답했다. 전체적으로는 열 명 가운데 6명 정도(58%)가 폭동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 같은 결과는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 연구팀이 조사한 것으로 LA타임스가 이를 인용해 26일 보도했다. 로욜라 대학은 4·29 LA폭동 발생 이후 5년마다 LA 주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오고 있는데 5년 내 폭동 재발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지난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하락세를 보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이번에 조사된 수치(58%)는 1997년 조사 당시 65%를 기록한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5년 전인 2012년 조사 때보다 10%포인트 이상 급등했다. 눈에 띄는 조사결과는 폭동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청년층(18~29세)에서 오히려 더 폭동 재발을 우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사 대상자 전체에서 나타난 우려 수치보다 약 10%포인트가 더 높았다. 45세 이상 연령층에서는 응답자의 약 절반 만이 폭동 재발이 우려된다고 답했다. 고용 면에서는 실업자나 시간제 근로자, 인종적으로는 백인과 아시안 보다 흑인과 라티노 들이 더 폭동을 걱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병일 기자 kim.byongil@koreadaily.com

2017-04-26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아메리칸 악몽' 현재 진행형

그날 이후 25년째 피해자 모임 말만 번지르르 기념식 안 나가 성금 온데간데…슬픔·분노 여전 지난 15일 오후 7시 LA한인타운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4·29 폭동 피해자 모임(회장 장진형)'을 찾았다. 매월 셋째 주 토요일이면 15~20명의 4·29 폭동 피해자는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일상을 나눈다. 폭동이 일어났던 1992년부터 25년째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며 세월을 버텨 온 이들은 폭동의 피해자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나눠 갖는다. 하와이언가든에서 리커스토어를 운영하는 주성호(62)씨는 "이 모임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한다"며 "이 시간을 위해 한 달을 버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무엇이 이들을 여전히 함께하도록 만드는 걸까. 주씨는 "폭동은 한 번도 제대로 기억되지 않았다"고 했다. "매년 4월 29일이 돌아오면 기념식이다, 추모식이다 말만 번지르르했어요. 정작 피해를 입은 우리는 배제된 채로 4·29 폭동을 기념했지요. 피해자끼리는 폭동과 폭동 이후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니 계속 모인 거 아니겠습니까." 상처는 폭동 이후 더 깊어졌다. 의도적으로 재기를 방해한다고 느껴질 만큼 무리한 재영업 조건에 2~3년을 허송세월해야 했다. 서로를 위로하며 터전을 다져 가던 사람들이 하나 둘 한국으로,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세월이 흘러 세상을 떠난 피해자도 많다. 장 회장은 "폭동 당시에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연령층이 50~60대였는데 현재는 대부분 돌아가셨다"며 "우리도 벌써 나이 70을 바라본다. 우리가 은퇴하고 나면 누가 4·29 폭동 피해자를 기억하겠느냐"며 씁쓸해 했다. 미국과 한국에서 수천만 달러 성금이 모였지만 이들에게 돌아간 건 가구당 3000달러가 전부였다. 임성일(69)씨는 "여러 한인 단체에서 우리를 위한답시고 성금을 모았다. 하지만 정작 성금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그 성금을 어떻게 쓰는지는 밝히지도 않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험한 세월, 이들을 버티게 한 건 자식이었다. 하지만 무너진 삶의 터전을 다시 세우느라 어린 자식에게 제대로 온정을 쏟지 못한 게 아직도 마음에 사무친다. 그 미안함을 속죄하듯 4·29 폭동 피해자 모임은 10년째 매달 500달러를 청소년을 지원하는데 기부한다. 이들이 4·29 폭동을 기억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폭동 25주년을 맞는 29일, 수많은 한인단체가 각종 행사를 열어 이날을 기념하지만 정작 이들은 참여하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입을 모아 "4·29 폭동을 치부로 여기고 상징적인 사건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며 "지금이라도 그 안에 얽힌 한인사회의 문제를 파헤쳐야 한다"고 했다. "'피해자들은 정부 지원도 받고 재기에도 성공해 떵떵거리며 산다'는 오해가 아직도 많이 퍼져 있어요. 우리가 바라는 건 역사를 제대로 기억해 명예 회복을 하는 거지 매년 추억거리로 남는 게 아닙니다." 잊혀진 일이 돼 가는 4·29 폭동은 이들에겐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되는 역사다. <관계기사 2면> 김지윤 인턴기자 kim.jiyoon2@koreadaily.com

2017-04-26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는 잊혀졌다"

LA타임스 관련 기사 흑인 관점만 보도 여전히 '두순자 사건' 직접적 원인처럼 한인사회 "형평성 잃은 편파성에 분노" 4.29폭동 25주년을 코 앞에 둔 시점에 LA타임스가 흑인커뮤니티 관점에서만 바라본 폭동 관련기사를 보도해 한인사회에 논란이 되고 있다. LA타임스는 25일자 캘리포니아섹션 톱으로 '당신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You are not forgotten)'라는 제목을 달고 4.29폭동(LA폭동) 25년 후를 조명하는 기사를 실었다. 매체는 이 기사에서 폭동 당시 가장 큰 피해 당사자인 한인커뮤니티의 관점이나 주장은 완전히 배제한 채 흑인커뮤니티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보도했다. 신문은 또 사진설명과 본 기사에서 폭동과 직접 연관이 없는 라타샤 할린스(당시 15세)양에 대한 추모 행사를 소개하며 '한국출생 업소주인(South Korean-born shopkeeper)'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할린스는 일명 '두순자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의 희생자인데 가해자가 태어난 나라를 밝히는 것이 과연 필요했느냐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10년 전 버지니아텍 총기난사 사건의 경우 범인 조승희가 한국출생이라는 것을 표현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특히 4.29폭동의 직접적 도화선은 로드니 킹 사건에 대한 관련 경관 4명의 무죄 평결이었다는 점에서 굳이 폭동 발생 13개월 전에 발생한 두순자 사건을 폭동과 연관시켜 보도해 4.29폭동을 현재 시점까지 한인커뮤니티와 흑인커뮤니티간의 인종갈등으로 몰고 가는 느낌이라는 것이 기사를 읽은 한인 독자들의 평이다. 케빈 김(53.터헝가)씨는 "이 기사를 읽은 뒤 편파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폭동 당시 주류 언론이 행했던 인종차별적 보도 방식이 25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고 말했다. 제니 정(40.LA)씨는 "흑인사회 나름의 분노와 가족들의 슬픔이 있겠지만 분명히 형평성을 잃은 편파적인 기사를 게재했다"면서 "한인사회가 공동으로 강력하게 대처해 LA타임스로부터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라 전 LA한인회장은 "흑인커뮤니티의 주장이 다 옳다 해도 한인커뮤니티의 피해와 관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왜곡의 소지가 있다고 본다"면서 "오늘 내일 중으로 LA타임스에 항의편지를 보내고 관련 기자회견도 할 생각이다"고 밝혔다. 폭동 당시 주류 언론 보도 행태에 대해 다수의 사회학자들은 전형적인 미디어 플롯에 의한 피해자 타겟팅 사례의 하나로 꼽고 있다. UC리버사이드 장태한 교수는 "전형적인 주류 언론 보도방식이다. 한인사회 입장이나 피해사실은 반영하지 않고 마치 한인사회가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것처럼 은연 중에 묘사했다"고 지적했다. 폭동 당시 비영리단체가 발표한 한인사회의 폭동 피해액수는 3억5000만 달러에 달하며 약탈이나 방화 등으로 손실을 입은 한인 업소가 2200개를 넘었다. 폭동 기간 전체적으로 인명피해는 55명이 숨졌으며 2000명 이상이 부상 당했다. 체포된 사람이 1만1000명을 넘었다. 김병일 기자 kim.byongil@koreadaily.com

2017-04-25

"4·29폭동 24주년, 그날 잊지 말자"

"1992년 4월 30일 밤을 잊지 못합니다. 재성이가 저 대신 죽은 것 같아 늘 생각이 나네요." 4·29폭동이 발생한 지 24년이 지났지만 존 이(63)씨는 당시 상황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이씨는 "지금도 혼자 있으면 재성이와 헤어진 순간이 떠오른다"며 아픈 기억과 씨름하는 모습이다. 1992년 4월 30일, 이씨는 당시 폭동 한인 피해자 중 유일하게 숨진 고 이재성(당시 19·샌타모니카 칼리지 1학년 재학)군과 함께 있었다. 그와 이군, 한인 젊은이들은 웨스턴과 5가에 있는 가주마켓 주차장에 모여 자율방범대 역할을 자진했다. 한인 라디오방송을 들으며 한인 업주들이 경비 지원을 요청하면 주저 없이 달려나갔다. "재성이가 죽기 전날부터 가주마켓 주차장엔 젊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야구방망이, 총을 들고 나섰죠. 어머니나 아내가 찾아와 위험하니 집에 가자고 혼내기도 했고요." 존 이씨에 따르면 이재성군은 당시 원산면옥(3가와 호바트)에 폭도가 들이닥쳤다는 지원요청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원산면옥 앞에 도착할 때 폭도로 오인 받았고 총격으로 숨졌다. 이씨는 "저와 일행이 지원 나가려던 것을 재성이가 자기 친구랑 가겠다고 했다. 출발한 지 3분이 지나 총성이 들렸는데 그 아이가 죽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존 이씨는 이재성군 사망 후 4·29폭동 평화대행진도 앞장섰다. 마음의 빚 때문이다. 24년이란 세월이 지난 요즘 이씨는 야속함을 더 느낀다. 그는 "다들 폭동을 잊고 사는 것 같다"며 한인사회가 4·29 폭동에 무덤덤해진 반응을 꼬집었다. 특히 한인사회의 세대 간 포용과 세대교체를 주문했다. 폭동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이민 2~3세대의 역량을 키워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재성이가 개죽음을 당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한인사회가 과거를 기억하려고 하지 않고 각자 사는 일에만 매달리잖아요. 단체장이나 리더들이 반성하고 한인사회를 위해 구심점을 만들어주길 바랍니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

2016-04-28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